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길(朴斗吉)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7023
  • 전몰일자 : 19510518

공훈사항

박두길 대위는 강원도 영월군 연곡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박 대위의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박 대위는 1950년 5월경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제10기로 임관하여 제7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50년 7월 5일 제7사단이 해체됨에 따라 제1연대는 수도사단에 편입되었고, 동년 10월 25일 제9사단이 창설될 때 연대의 제2대대가 제9사단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제2대대 소속이었던 박 대위는 제9사단 직할부대로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박 대위가 소속된 제1연대는 동두천 축선의 38도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후 연대는 7월 5일 수도사단에 편입되어 7월 6일부터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 방면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제8사단의 뒤를 따라 북한군 제12사단이 계속 공격해오자, 연대는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안동전투에 투입되어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 일대에서 적군과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고, 제9사단은 강원 정선 일대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후 제9사단은 1951년 3월 5일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안동 일대까지 침투했다가 북상하던 북한군 제10사단이 두타산(1,361고지) 북쪽의 삼화리를 경유해 이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따라 박 대위와 연대 장병들은 3월 12일 송계리에 투입되었다.
연대는 북한군을 차단하기 위해 남쪽과 동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들은 포위망이 압축되자 완강하게 저항했다. 적군은 밤이 되어 아군이 공격을 잠시 중지한 틈을 이용하여 18일 새벽에 포위망을 뚫고 북쪽의 목계리로 도주했다.
유엔군은 1951년 4월에 접어들어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고 제9사단은 적의 저항을 받으며 4월 중순 하진부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에 현리 일대의 국군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5월 공세를 개시했다.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된 가운데 연대는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했지만 박 대위는 속사리 부근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1951년 5월 18일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길 대위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8-ㅋ-03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