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필(박동필)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7213434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박동필 하사는 경상남도 부산시 금산동(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27번지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 진격작전을 진행 중인, 1950년 10월 중순경 경상남도 구포에 위치한 육군 제3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했다. 이후 박동필 하사는 헌병으로 분류되어 다시 부산에 있는 헌병교육대에서 헌병임무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배우고 同 교육대 조교요원으로 자충되었다.
한편 육군직할 헌병사령부는 美 군정 시절인 1947년 3월 15일에 군감대로 설치하여 운용하다가 1948년 3월 11일에 군기사령부(조선경비대)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15일에 병과 명칭을 헌병으로 변경했다. 이후 1949년 1월 16일에 서울 용산에서 헌병학교가 창설되어 운영되다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13일 임시 폐교되었다. 그러나 야전헌병 양성을 위해 8월 27일부터 1951년 6월 20일까지 부산에서 헌병교육대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당시 헌병의 임무는 후방지역에서의 질서유지와 피난민 속에 침투하는 적 오열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박동필 하사가 교육대 조교로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작전으로 총공세를 펼쳤으나 10월 24일과 11월 24일에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후 국군 장병들은 12월 중순까지 38도선 일대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차후에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박동필 하사는 헌병요원들과 함께 후퇴하는 병력 수습과 교통통제, 낙오자 통제 등의 임무를 완수 후 12월 중순경 부산에 위치한 헌병교육대로 복귀했다.
당시 부산 지역은 미군의 지원물자가 대부분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부산에는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에 북한군 유격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북으로 진격하는 시기에도 그치질 않았고, 중공군이 참전하자 더욱 심해졌다.
헌병교육대는 헌병요원의 교육훈련에 전념하면서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자체방어도 수행했다. 박동필 하사는 부대원들과 함께 1951년 1월 1일 야간 헌병교육대 인근에 게릴라가 출몰하여 이들 소탕 작전에 투입되어 색출된 게릴라와 교전하던 중 적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필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3판-11면-687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4-ㅇ-07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