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칠(朴東七)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1128091
  • 전몰일자 : 19530301

공훈사항

박동칠 이등상사는 1926년 8월 15일에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9월 초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8군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부대조정에 의해 미 제2사단에 배치되었다.
박동칠 이등상사가 전입했던 11월 초순, 미 제2사단은 호남지역 후방지역 작전임무를 국군 제11사단에 인계하고, 북상하여 개천 및 군우리 지역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유엔군의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에 참가했으나,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후방이 차단되어 군우리 협곡을 통과하면서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여 충주에 집결한 후 미 제8군의 예비가 되었다.
박동칠 이등상사가 소속된 미 제2사단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에 원주전투, 중공군의 2월 공세에 지평리전투, 중공군의 5월 공세에 벙커고지(800고지)전투에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여 공격을 저지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사단은 5월 24일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5월 말에 인제를 점령하고, 6월 중순경에 펀치볼 일대를 확보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이러한 상황은 1952년까지 계속되었다.
미 제2사단은 1952년 7월 17일부로 미 제1군단으로 배속되어 미 제45사단으로부터 덕은동-281고지 일대의 역곡천 남쪽 방어진지를 인수하였다. 이날 중공군은 대대적인 공격으로 아군의 방어진지 점령을 방해했다. 이후 사단의 전초진지인 불모고지(266고지)-포크찹고지(255고지)-에리고지(191고지)에서는 9월 20일까지 매일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국은 전초진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미 제2사단 지역에서는 1953년이 되면서 전선의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에 사단 장병들은 진지보강 및 수색활동에 집중했다. 박동칠 이등상사가 소속된 중대는 3월 1일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칠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1판-5면-01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ㅈ-00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