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윤(朴東允)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194225
  • 전몰일자 : 19520624

공훈사항

박동윤 이등중사는 1927년 3월 7일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이등중사는 1951년 3월경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13경비대에 배치되었다.
제13경비대대는 후방지역에서의 공비토벌과 보급로 확보 등을 위해 1951년 4월 20일 경북 대구에서 창설된 부대로서 미 제1군단을 지원했다. 박 이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공산군은 중공군 제5차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공산군은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대 규모인 3개 병단, 11개 군, 35개 사단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총동원하여, 춘계 공세를 감행했다. 적들은 4월 공세(4. 22.~30.) 때는 서부전선(개성-화천)에 주력을 집중하고, 뒤이은 5월 공세(5. 16.~22.) 때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 주공을 투입하여 총공세를 취했다. 국군과 유엔군도 가용전력을 총동원하여 사력을 다하며 공산군의 공세에 대응하여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잇는 선에서 적의 공세를 저지했다.
5월 말부터 공세를 시작한 유엔군은 6월까지 임진강-연천-철원-김화-화천-향로봉-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진지 강화에 들어갔다. 미 제1군단은 서부 축선에서 진격했고, 제13경비대는 군단의 후방지역에서 보급로 경계, 수색정찰작전 등을 통해 후방지역의 안정을 보장함으로써 군단의 작전에 기여했다.
중공군 5월 공세 이후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7월 10일 최초로 회담이 열렸다.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투양상은 대규모 기동전 없이 회담에서의 설전과 더불어 전선에서의 고지쟁탈전으로 변모되었다. 미 제1군단도 현 진지를 유지하면서 소규모 전초진지 쟁탈전을 계속했다. 1952년 2월에 미 제45사단이 투입되어 미 제1기병사단과 교대했다. 미 제45사단은 6월 6일부터 카운터 작전을 시작하여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14개의 전초진지를 탈취했다. 이 고지들은 후에 ‘불모고지(Old Baldy)’, ‘포크찹고지(Porkchop Hill)’라고 명명되었다. 이때 제13경비대대는 사단 후방지역의 보급로 경계와 더불어 적 정찰대를 탐색 격멸하여 작전의 성공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박 이등중사는 1952년 6월 24일 소대원을 이끌고 후방지역 수색정찰 중 적과 조우하여 교전하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윤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유해(40묘역-1판-1683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7-ㄷ-08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