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원(朴東遠)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2635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박동원 일병은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을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50년 1월경 육군에 입대하여 서울 영등포에 있는 제1병기대대에 배치되었다.
제1병기대대는 1947년 1월 1일 창설된 육군 병기대대가 1948년 1월 1일부로 개칭된 부대였다. 육군본부는 병기부대를 확충하여 1948년 9월 1일 육군 병기단을 창설했다. 이때 병기단은 제1·2병기대대 본부와 제1병기정비중대, 제1병기탄약중대, 병기중정비중대, 병기경정비중대, 병기창고중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병기의 대부분을 미군 군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보급·정비 능력은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이런 열악한 조것 속에서 박 일병은 부평의 미군부대에서 병기교육을 받으면서 병기부대의 양적, 질적인 향상을 위해 진력했다. 그러다 1948년 10월 5일 경기도 부평에서 육군특별부대병기단 관할로 육군자동차학교(병기학교 전신)가 창설되었고, 이때 박 일병은 동 학교로 전속되었다.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동두천, 포천 축선에 주공인 제1군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제7사단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 면에서는 7배, 화력 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사단 장병들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분전했으나,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쟁 개시 첫날인 6월 25일 포천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전쟁 초기에 탄약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대부분의 부대들이 탄약이 떨어져가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고, 고장난 화기도 보충, 수리하지 못해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 일병과 병기학교 장병들은 부평 창고에 보관된 총포를 2대의 트럭에 적재하여 위급한 의정부와 창동 지역에 지원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박동원 일병은 제7사단으로 탄약보급을 위해 의정부로 이동하던 중에 적 포격으로 6월 25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원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2판-5면-19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79-ㄷ-01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