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원(朴東元)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11146
  • 전몰일자 : 19520206

공훈사항

박동원 일병은 제주도 북군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박 일병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박 일병은 1950년 10월 1일에 입대 후 제주도에 있는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동년 10월 25일 제9사단이 창설됨에 따라 제9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박 일병이 부대에 전입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아군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는 전황 속에서 제9사단은 10월 25일에 서울에서 제28·제29·제3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창설되었다. 제9사단은 11월 15일에 전북 금산군 남이면에서 1개 대대 규모의 공비를 소탕했고, 동년 11월 20일에는 상용리에서 적 200여 명을 포획 섬멸하였다.
제9사단은 1951년 6월 24일에 새벽 고지 탈환을 위해 3개 방향에서 일제히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고지를 점하고 있는 중공군이 증강된 병력으로 완강하게 저항함에 따라 철수하여 전력을 정비한 후 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빼앗긴 고지를 되찾기 위해 6월 26일 새벽을 기하여 기습공격을 가해 왔다.
제9사단은 1951년 7월 말까지 계웅산을 중심으로 한 김화지구전투에서 수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저지하며 격퇴했다. 아군은 1951년 10월이 되자 적군이 휴전회담을 제의한 이유가 전력 정비를 위한 시간 확보에 있음을 간파했다.
이에 일명 ‘코만도 작전’이라는 추계공세를 대대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당시 제9사단은 10월 5일부로 다시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10월 17일에 미 제3사단이 맡고 있던 395고지(백마고지) 일대의 방어진지를 인수하여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속에서 전초진지를 탈취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와 수색정찰이 진행되었다. 한편 휴전회담장에서는 유엔군과 적군 측이 서로의 제안을 일정 정도 포함해 가며 협상을 진행하였다.
마침내 유엔군과 북한군은 1951년 11월 27일 현 전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박 일병은 전초진지 쟁탈전에서 앞장서 돌격을 감행하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952년 2월 6일에 끝내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원 일병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9-ㅍ-00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