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번(朴東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1951
  • 전몰일자 : 19510206

공훈사항

박동번 일병은 경상북도 대구시 비산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일병은 9월 초순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영천지역 전투에 투입되어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저지, 격멸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대통령 부대표창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연대는 경주-안동-충주-장호원-서울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후,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연대는 11월 3일부터 7일까지 개천 동북방 비호산에서 격전 끝에 중공군 제112사단을 물리치고,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연대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사단 지휘소가 습격당해 지휘통제능력을 상실한 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12월 3일부터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준비에 매진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다.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적의 압박이 가중됨에 따라 연대는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석항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 병력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4일 대야리로 이동하여 24일까지 치열한 교전 끝에 영월을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박 일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에서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2월 6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번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51-ㅌ-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