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민(朴東珉)

  • 군별 : 경찰
  • 계급 : 경감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820

공훈사항

박동민 경감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출생했다. (출생 일자 및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남경찰국 남해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통영에서 전사했다.
박 경감이 경찰에 입문할 무렵에는 제주 4·3사건(1948년)에 이어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북으로부터 유격대의 계속적인 침투와 함께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토벌작전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49.12.16-1950.2.28)로 시행했으며, 박 경감이 소속된 경남경찰은 제2단계 기간에 참여하여 대대적인 포위 및 수색작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아군 군경부대가 지연전을 전개하며 축차적으로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편성하기까지 남해경찰은 해안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중부와 서남부 쪽에서 북한군이 진격하자 남해경찰은 경남경찰의 일부로서 7월 21일 전북경찰과 함께 호남과 영남을 잇는 관문인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7월 23일 북한군 제6사단의 일부가 정읍을 거쳐 광주로 남진하였고 일부는 7월 24일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군경부대는 진주·마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6사단에 대비하기 위해 경남·전남·전북의 경찰병력 4,000명으로 전투편성을 한 다음, 지휘소를 함안군 군북면에 두고 미 제25사단, 한국 해병대와 합동으로 적과 대치했다.
8월 15일 미명을 기하여 북한군 제7사단 예하 1개 대대규모 병력이 고성 방면에서 통영으로 향했다. 당시 해병대가 통영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경남경찰은 통영의 원문고개 일대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8월 16일 야간부터 아군 군경부대는 통영으로 진입하고자 하던 북한군과 원문고개 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 20일 박 경감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민 경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6-ㄷ-018)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