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락(朴東樂)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9243309
  • 전몰일자 : 19530716

공훈사항

박동락 이등중사는 1931년 1월 11일에 경상북도 영천군(現 영천시) 고경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지속되면서 고지 쟁탈전이 진행되던 1952년 9월 25일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3보충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보충대는 군사훈련과 병력보충 업무를 병행했다.
박동락 이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1952년 여름부터 공격작전을 전개한 적이 가을에 접어들어 전 전선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잡고 아군 전초진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일환으로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도 실시했다.
1953년 초, 휴전회담이 여전히 중단된 상황에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쌍방은 1952년 말까지 계속된 치열한 고지쟁탈전과 전선정비를 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목표로 하되 자신들의 입장 관철을 위한 영향력의 행사하려고 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과 관련하여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 그리고 정치, 심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의 종결 등 군사. 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모색에 분분했다.
박동락 이등중사는 신병보충 업무에 전념하다가 1953년 1월경에 부대조정에 의거 제6사단 제19연대로 전속되었다. 제6사단은 1953년 1~2월에는 전력증강과 진지공사에 주력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되자 공산군은 작전에 양호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유엔군 전초진지에 대하여 제한된 규모이지만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5월부터 하계공세, 즉 휴전 전 최후의 공세라 칭하는 대공세를 취했다. 사단 정면의 중공군은 강원도 김화 일대 교암산 지역을 목표로 하여, 7월 10일 대대적인 공격을 했다. 일명 금성지구전투가 시작되었다.
제19연대 부대원들은 7월 14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교암산에서 적근산-주파령을 잇는 선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은 적근산 방어진지에 대해서 7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박동락 이등중사는 중공군의 7월 공세에 따른 방어 작전에 참여하여 적근산 방어진지에 전투근무지원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3년 7월 16일 적 포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락 이등중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7판-8면-13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9-ㄴ-00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