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동규(朴東圭)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1015

공훈사항

박동규 순경은 1931년 3월 29일 전북 장수군 장수읍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소속으로 재직 중 무주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4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전북경찰국은 곡성-전주, 완주-전주를 잇는 주요 보급로 경비,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진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31일 진주가 함락되자 군경부대는 마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6사단에 대비하기 위해 경남·전남·전북의 경찰병력 4,000명으로 전투편성을 한 다음, 지휘소를 함안군 군북면에 두고 미 제25사단, 한국 해병대와 합동으로 적과 대치했다.
8월 하순이 되자 경찰부대는 적의 최종공세에 대비하여 진동리지구에 경남경찰, 전남경찰을 배치하고, 함안지구에는 전북경찰을 배치하여 미 제25사단의 방어진을 보강했다. 또한 의령 방면에서 침공하는 적 제7사단에 대비하여 전북경찰 1개 대대를 함안군 법수면에 배치하고, 미산령과 전투산에는 전북경찰독립대대와 전남경찰 2개 중대를 배치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자 각 도(道) 경찰국은 관할지역 경찰관서를 수복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10월 중순 전북도경을 수복한 전북경찰국은 잔적 소탕과 치안 유지에 들어갔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들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의 공비섬멸 작전(제1차: 1951.3.1.-4.10., 제2차: 1951.4.15.-5.25., 제3차: 1951.7.15. -8.15.) 지침에 따라 전북도경 경찰국은 이 기간에 공비섬멸작전을 수행했다.
3차례에 걸친 공비섬멸에도 불구하고 산악지역에 근거를 둔 공비들의 활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951년 10월 16일 무주군 설천면 공비들이 출현하자 전북경찰국 병력이 토벌에 참여했고, 박 순경은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동규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6면-04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ㅇ-09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