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도영(朴道永)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250867
  • 전몰일자 : 19520924

공훈사항

박도영 이등중사는 1920년 10월 7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출생하였다. 박 이등중사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박 이등중사는 1951년 2월 19일에 입대 후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9사단 제30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이등중사가 부대에 전입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 일대에서 적군과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고, 제9사단은 강원 정선군 창리 일대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공군 1951년 2월 공세를 맞이하여 사단 서측방에 대한 적의 공격을 치열한 전투 끝에 막아냈다.
이어서 제9사단은 1951년 3월 5일에 제1군단에 배속되어 안동 일대까지 침투했다가 북상하는 북한군 제10사단을 12일부터 18일까지 강원 정선군 송계리 일대에서 포위 격멸했다.
유엔군은 1951년 4월에 접어들어 38도선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고 제9사단은 4월 중순에 강원 고성군 진부리 일대까지 진격 후 제3군단에 배속되어 강원 인제 동남방의 한석산, 가리봉 일대를 점령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에 현리 일대의 국군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된 가운데 제9사단은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험준한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했다.
1952년 6월 21일에 대규모의 포로획득과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공군 1개 연대병력 3,5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사단 정면의 50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를 완료한 제9사단은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강원 철원 서북방의 백마고지와 금화지구에서 중공군과 대치했다.
제9사단은 주저항선을 보강하면서 백마고지, 평강 진출로 상에 있는 신화산(343고지)과 그 주변 고지 일대에서 소규모 진지쟁탈전과 전투정찰을 지속했다. 하지만 박 이등중사는 1952년 9월 24일에 수색정찰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도영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9-ㅌ-02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