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도열(朴道烈)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118

공훈사항

박도열 경사는 1920년 5월 15일 전남 구례군 간전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5년 10월 20일 경찰에 입문하였으며, 전몰 당시 구례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고성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박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구례경찰은 아군이 지연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까지 오열 색출, 정보수집, 주보급로 경비, 철도경비, 치안유지,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0일 전주를 점령하고 잠시 부대를 정비한 후 7월 22일 공격을 재개했다. 북한군 제13·제15연대는 국군과 경찰의 저항을 뚫고 23일 장성·광주를, 24일 화순·나주·장흥을 점령하고 보성 방면으로 진출했고, 제1연대는 24일 남원을 점령 후 구례-순천으로 남진했다. 이에 전남편성관구사령관은 순천·광산 인근의 경찰과 각지에서 후퇴한 경찰을 3개 부대로 재편하여, 그 중 박 경사가 소속된 부대를 순천 서북방 학구로 출동시켜 적을 저지하도록 했다.
북한군이 계속해서 남진함에 따라 구례경찰을 포함한 전남경찰병력(200명)은 여수로 이동한 후 선박 편으로 고성지역으로 기동했다. 그러나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자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의령이나 함안 방면으로 기동해야 했다. 8월 4일 함안에 도달한 구례경찰은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까지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여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전선이 북상하면서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구례경찰은 10월 1일 구례경찰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 주요 시설 경비, 오열 색출, 잔적소탕작전을 실시했다.
1951년 1월 18일 구례 수월리에 공비가 출현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민간인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자 구례경찰이 출동했다. 이날 박 경사는 적을 격멸하기 위해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도열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ㅈ-07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