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도세(朴道世)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0143593
  • 전몰일자 : 19520923

공훈사항

박도세 일등중사는 1932년 2월 2일 경상남도 통영군 장승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5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도세 일등중사가 전선에 배치될 당시 전황은 서울 함락 후 낙동강까지 철수했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친 상황이었다. 이어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다.
박도세 일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1951년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전 전선이 밀리게 되자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2월 25일 중공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박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을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박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6월 4일 적은 강력한 박격포 사격의 엄호하에 박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의 전초진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장의 1209고지를 공격해 왔으나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1951년 8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지쟁탈전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하였다. 그 후 박도세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0월 12일에 시작된 전투에서 북한군 제19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탈취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52년 지형능선과 수도고지에 대한 제한공격이 무위로 끝난 후 전선은 8월 초까지 교착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9월 6일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각각 1개 중대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왔다. 지형능선상의 전초소대는 오후 9시경 수명의 생존자만이 철수하면서 능선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박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은 9월 20일까지 수차에 걸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진지를 사수하였다. 그러던 중 박도세 일등중사는 중상을 입고 제2외과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1952년 9월 23일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도세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35묘역-4판-2117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6-ㅍ-06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