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덕암(朴德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21361
  • 전몰일자 : 19520921

공훈사항

박덕암 일병은 1930년 4월 20일에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1월 말,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8군의 537통신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중대는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다.
박덕암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3월 중순, 미 제7사단은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중서부전선에서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통신중대는 사단을 직접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중동부전선에는 국군 제2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1952년 7월부터 12월까지 중공군 4개 군단(제38·제15·제12·제68군단)과 전초진지 및 방어선상의 주요 고지를 서로 점령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군단 좌측의 국군 제9사단이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에서 혈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1952년 여름부터 수차례에 걸쳐 아군 진지를 공격했으며, 가을로 접어들면서는 전 전선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아군 진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미 제7사단은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이는 차후 예상되는 적 공격에 대비하고, 적 침투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박덕암 일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9월 21일에 작전지역으로 통신 점검을 위해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로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덕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1판-2면-15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0-ㅂ-09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