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덕상(朴德相)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1001

공훈사항

박덕상 경사는 1926년 4월 25일 부산시 영도구 영선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구례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구례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치안국은 전시 비상경비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했다.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구례경찰은 구례-곡성, 구례-남원, 구례-하동을 잇는 군 주보급로 통제,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했고, 구례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0일 전주를 점령하고 잠시 부대를 정비한 후 7월 22일 공격을 재개했다. 북한군 제13·제15연대는 국군과 경찰의 저항을 뚫고 7월 23일 장성·광주를, 24일 화순·나주·장흥을 점령하고 보성 방면으로 진출했고, 제1연대는 24일 남원을 점령 후 구례-순천으로 남진했다. 이에 전남편성관구사령관은 순천·광산 인근의 경찰과 각지에서 후퇴한 경찰을 3개 부대로 재편하여, 그 중 박 경사가 소속된 부대를 순천 서북방 학구로 출동시켜 적을 저지하도록 했다.
북한군이 계속해서 남진함에 따라 구례경찰을 포함한 전남경찰병력(200명)은 여수로 이동한 후 선박 편으로 고성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자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의령이나 함안 방면으로 이동해야 했다. 8월 4일 함안에 도달한 구례경찰은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까지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여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전선이 북상하면서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구례경찰은 10월 1일 구례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 주요 시설 경비, 오열 색출, 잔적소탕작전을 실시했다. 10월 1일 구례 수월리에 잔적이 출현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민간인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자 구례경찰이 출동했다. 이날 박 경사는 적을 격멸하기 위해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덕상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ㅁ-06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