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덕만(朴德万)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5701167
  • 전몰일자 : 19521109

공훈사항

박덕만 일등중사는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군 동래읍(現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2월 1일 육군잠정포병사령부에 입대했다. 同 사령부는 1949년 6월 20일 육군포병연대로 개편되었고 동년 10월 15일 육군포병학교로 개편되었다.
박덕만 일등중사는 포병학교 예속의 제1포병대대에 배치되어 조교로서 포병 장병 교육훈련에 전념했자. 동년 10월 24일 제1포병대대는 제8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제8사단은 1950년 4월 22일까지 진행된 태백산 일대에서 무장 유격대 토벌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강원도 강릉으로 이동하여 경계 작전을 수행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을 감행하자 사단은 강릉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 충북 제천 일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제1포병대대는 강력한 화력지원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사단의 철수를 엄호했으나, 초기 전투에서 많은 부대가 극심한 피해를 입자 육군본부는 1950년 7월 5일 사단을 재편했다.
이때 포병도 기존의 제1·3·5·6·7포병대대를 해체하여 제1포병단을 창설하고, 예하에 제10·11·16·17·18·50포병대대를 창설했다. 이때 박덕만 일등중사는 제50포병대대로 전속되었다. 제50포병대대는 함창 방면에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지연하다가 제8사단을 지원했다. 제8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의 신녕, 영천 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9월 중순 영천 전투에서 마침내 적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낙동강 전선의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포병은 기동부대의 화력지원에 주력하면서 자체경계도 수행했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수도 서울의 방위에 역점을 둔 군사적 보완책으로 전 전선에 걸쳐 부대를 재배치하는 한편 부대의 인원, 장비의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박덕만 일등중사는 제8야전포병단 제65포병대대에 재배치되었다. 제8야전포병단은 1952년 7월 23일 제65·66포병대대를 예하 대대로 하여 창설되었고, 제12사단을 화력지원했다.
박덕만 일등중사는 제12사단이 창설되고 임무수행 전인 11월 9일 강원도 김화 일대에서 진지강화 및 부대 재편성 중 중공군 침투부대의 기습을 받았다. 그는 전포반 요원들을 통제하며 교전 중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덕만 일등중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8-ㅌ-017)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