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덕만(朴德萬)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K1111090
  • 전몰일자 : 19530604

공훈사항

박덕만 일등중사는 1932년 1월 21일 부산시 서구 남부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일등중사는 1950년 8월 15일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 병으로 차출되어 미 제24사단에 배치되었다. 박 일등중사는 포로 신문, 편의대 활동, 첩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사단 작전에 기여하다 10월경 미 제7사단으로 전속되었다.
미 제7사단은 10월 29일 부산에서 출항하여 11월 8일 함경남도 이원으로 상륙하였다. 이후 갑산을 거쳐 11월 말에 혜산진을 점령했다. 이 무렵에 대규모 중공군이 장진호로 진격하는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하고, 일부는 원산까지 진격하여 미 제10군단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사단은 11월 27일 혜산진에서 철수하여 함흥으로 이동, 함흥항 외곽 교두보선을 점령하고 있던 미 제3사단과 함께 철수작전을 지원하고, 12월 21일 흥남항에서 철수하여 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중공군이 12월 31일 제3차 공세를 감행하자, 사단은 대구 일대에서 부대정비를 하다가 1951년 1월 7일 북상하여 평창 남서쪽 고지군을 점령했다. 사단은 이곳에서 2월 11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저지했다. 그리고 2월 21일부터 제천-평창 축선으로 공격하여 2월 말에는 평창 북쪽의 대미산을 탈취했다. 이 전투에서 박 일등중사는 앞장서서 공격하다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박 일등중사는 긴 치료 끝에 회복되어 1953년 1월경 제11경비대대로 전속되었다. 제11경비대대는 후방지역에서의 공비토벌과 보급로 확보, 포로경비 등을 위해 1951년 2월 14일 경남 김해에서 창설된 부대였다. 한편, 유엔군이 북진할 때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이 지방 좌익 세력들을 규합하여 게릴라부대를 조직하여 제2전선을 형성했다. 이들 게릴라들은 국군의 수차례에 걸친 소탕작전으로 1953년 1월경에는 거의 궤멸되었으나, 소수의 일부 인원이 살아남아 아군 후방을 교란했다.
박 일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제11경비대대는 서남지구경비사령부에 배속되어 전라남도 일대의 공비소탕작전을 하고 있었다. 박 일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이 토벌작전에 앞장섬으로써 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으나, 1953년 6월 4일 백운산 일대 수색작전 중 적을 발견하고 교전 중에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덕만 일등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51591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46묘역-8판-1071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8-ㅍ-07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