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덕만(朴德萬)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215283
  • 전몰일자 : 19530720

공훈사항

박덕만 이등중사는 1918년 5월 20일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던 1950년 12월 18일 부산에 있던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박덕만 이등중사가 부대로 배치되었을 무렵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한 후 1951년 1월 7일에 평택-안성-장호원을 연하는 선으로 이동하여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전력이 소진돼 더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고, 추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문막 북쪽의 판대리 부근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6월에 들어 제6사단은 김화 북방의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연하여 주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박덕만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1952년 하반기에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금성천 동북방 A, B고지)에 대한 고지쟁탈전을 정면의 중공군과 치열하게 전개했다. 제2연대와 정면의 중공군은 9월 29일부터 30일까지 A, B고지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을 2차례나 실시했다.
이후 제6사단은 연대별로 전방방어지역을 교대로 담당하게 했다. 박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1953년 2월 5일부로 교암산 지역을 담당하다가 5월 17일부로 사단의 예비로 전환했다. 당시 중공군은 휴전협상이 타결될 기미가 보이자, 타결되기 전에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7월 10일부터 제19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교암산을 향해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제19연대는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제2연대 장병들은 사단명령에 의거 7월 11일부로 교암산 지역을 인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박덕만 이등중사는 7월 15일 전투에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부대와 근접한 제1의무치중대로 후송되었다. 이곳 병원에서 의료진들에 의해 정성스런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월 20일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덕만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40묘역-2판-1639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9-ㅈ-01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