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덕남(朴德男)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601483
  • 전몰일자 : 19510228

공훈사항

박덕남 하사는 1927년 5월 4일에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現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진행 중이던 1951년 3월 중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박덕남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美 제10군단에 배속된 제5사단은 적 1951년 5월 공세 때 적의 종심기동을 저지하면서 캔자스선으로 진격하며 반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사단은 군단의 우측 전방 부대로서 6월 4일부터 한계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6월 17일까지 14일간의 격전 끝에 목표인 원통 북방 서화리 일대의 후덕리-981고지-산두곡산(1,019고지)을 잇는 新캔자스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사단은 8월 초순 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현리 일대에서 부대정비를 하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했다.
이 무렵 美 제10군단은 南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北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양구 지역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이 전투에서 제5사단은 가칠봉-서희령 전선을 굳건하게 지켜내면서 제3사단에 인계하고, 1952년 1월 23일부터 제1군단 배속으로 동해안 351고지-감호 일대를 잇는 전선방어에 투입되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47, 9사단으로서 월비산을 확보한 상태에서, 그 남쪽의 351고지를 비롯한 사단의 전초진지와 주저항선을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단은 진지를 강화하면서 책임지역 수색정찰 및 매복작전에 전념했다.
박덕남 하사는 1월 하순경 동해안 간성 일대에서 야간정찰 도중 북한군과 조우하여 교전 중 적의 기습사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나, 조속하게 회복되어 2월 중순경에 육군직할 원호대(援護隊)로 전속되었다. 원호대는 상이군인을 모아놓은 부대이지만 박덕남 하사는 거동이 가능하므로 원호대로 배치되자마자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는 중공군과 고지쟁탈전에 따른 전초 진지 방어 작전에 참여하여 분대원을 진두지휘하며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2년 2월 28일 적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덕남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5판-4면-19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5-ㅌ-061)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