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대하(朴臺夏)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914

공훈사항

박대하 순경은 1927년 2월 27일 충북 영동군 상촌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충북도경 영동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영동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영동경찰은 지역 내 주요시설 경비, 영동-옥천, 영동-대전, 영동-김천을 잇는 주요 도로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7월 3일 박 순경은 영동 각계리에서 옥천 방면의 도로를 경비하던 중 북한군 정찰부대로 추정되는 1개 소대규모의 적과 조우하여 박 순경이 속한 경비 팀과 적 부대 간 교전이 벌어졌다. 약 1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경비 팀은 적 3명을 사살하였으며, 영동경찰도 2명이 전사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7월 6일 청주가 함락되자 영동경찰은 아군 군부대와 병행하여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후방으로 후퇴했다. 영동경찰은 영동-김천-성주를 거쳐 7월 23일 고령에 도달하여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여했다. 박 순경은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는 큰 공을 세웠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9월 16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각 도(道) 경찰도 경찰관서 수복작전에 나섰다. 영동경찰은 9월 26일 영동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며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작전을 시행토록 했다. 박 순경은 제1차-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공비 수 명을 사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제3차 공비섬멸작전을 마친 후 박 순경은 영동경찰서에서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공비소탕작전에도 참여했다.
1951년 9월 14일 영동 양정리에 공비들이 출현하자 영동경찰이 출동하여 곧바로 양측 간 교전이 벌어졌다. 박 순경은 공비 1명을 사살하고 계속 전투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대하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ㅅ-04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