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대태(朴大泰)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K1137362
  • 전몰일자 : 19510407

공훈사항

박대태 이병은 1929년 11월 5일에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7사단으로 배치되었다.
박대태 이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중순에 미 제7사단은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미 제1해병사단을 후속하여 9월 18일에 인천으로 상륙했고, 이후 한강 이남으로 실시하여 9월 말에는 서울의 동쪽을 완전히 탈환했다. 얼마 후 사단은 원산상륙작전을 위해 10월 6일에 서울에서 철도와 차량으로 부산으로 이동했고, 10월 27일에 부산에서 출항하여 11월 8일에 함경남도 이원으로 상륙 후 풍산-갑산 방향으로 공격하여 11월 21일에는 혜산진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규모 병력을 이룬 중공군이 장진호로 진격하는 미 해병 제1사단을 포위하고, 원산까지 진격하여 미 제10군단의 후방을 차단해 철수해야 했다.
박대태 이병이 소속된 미 제7사단은 11월 27일에 혜산진에서 철수하여 함흥으로 이동, 흥남항 외곽방어선을 점령했다. 사단은 미 제3사단과 함께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흥남철수부대들을 지원한 후 12월 21일에 흥남항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부산항에서 하선 후에 대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를 했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주력을 서울로 지향하여 총공세를 실시했고, 이에 유엔군은 조직적으로 철수하며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사단은 1951년 1월 7일 대구에서 북상하여 평창 남서쪽 주천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얼마 후 2월 1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원주 동남쪽 백운산(1087고지) 고지에서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박대태 이병이 소속된 미 제7사단은 2월 21일부터 반격(일명 ‘킬러작전’)을 시작하여 제천-평창 축선으로 공격하였고, 2월 말에는 평창 북쪽의 대미산(1,232고지)에서 치열한 근접전 끝에 탈취했다. 그리고 3월 5일부터 일명 ‘리퍼작전’에 참가하여 현리-인제 축선으로 공격하여 3월 28일에는 인제 북방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진지보강과 수색작전을 강화했다. 박대태 이병이 소속된 소대는 4월 7일에 수색작전 중 적 정찰대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용감하게 전투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대태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90-ㅋ-07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