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대용(朴大鏞)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46809
  • 전몰일자 : 19511122

공훈사항

박대용 일병은 충청남도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았겼던 1951년 1월 초,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19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대용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2월 중순, 제6사단은 2월 11일 시작된 중공군 2월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4월 21일에 사창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4월 22일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후방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받고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다. 그리고 용문산 일대에서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박대용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5월 20일에 반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하였고,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함으로써 철의 삼각지대의 우측 지역인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잇는 선을 탈환했다. 이후 유엔군사령부 차원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었고, 따라서 전선에서는 큰 전투는 없었다.
1951년 가을이 되면서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몰두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행동을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먼저 제2연대가 9월 21일에 주방어선 전방의 819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얼마 후 박대용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 장병들이 9월 24일에 공격하여 28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819고지를 탈취했다. 그리고 사단은 10월 13일부터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백암산에서 금성천을 건너 정면의 중공군을 격파하고, 21일에는 교암산-송설리-송동리까지 진출했다.
이후 제19연대 장병들은 송동리 일대에서 동측으로 이동하여 등대리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사단은 11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949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1월 22일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대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0401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장병1묘역-103판-315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ㅋ-09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