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대규(朴大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0507400
  • 전몰일자 : 19530720

공훈사항

박대규 일등중사는 경상북도 영천군 고경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9월 초순, 경남 삼랑진의 육군 제6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1사단 제20연대에 배치되었다.
제11사단은 후방지역작전을 위해 9월 25일에 편성 완료되었고, 예하 부대로 제9·제13·제20연대를 두었다. 당시 박대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20연대는 경남 삼랑진의 육군 제6훈련소를 모태로 재창설되었고, 그는 창설 요원으로 충원되었다. 이후 연대는 10월 초순에 광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서남쪽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했고, 이후 1951년에는 회문산과 백아산 일대에서 실시하여 공비를 완전히 격멸했다.
제11사단은 4월 6일 호남지역 공비토벌임무를 제8사단에 인계하고, 동해안 양양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공산군 4월 공세와 공산군의 5월 공세를 대관령-강릉 선에서 저지하고, 5월 22일부터 강릉-양양 방향으로 반격하여 6월 10일에 건봉산-향로봉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제20연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던 월비산(459고지)을 11월 17일에 인수했으나, 북한군이 바로 다음 날인 11월 18일에 공격하여 11월 24일까지 수차례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은 연대는 월비산에서 철수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쌍방은 방어진지 보강에 힘썼다.
박대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20연대는 1952년 4월 15일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동하여 경비임무를 완수하고, 7월 11일에 양양에 위치한 사단으로 다시 복귀하여 건봉산 일대의 방어지역을 담당했다. 이후 제11사단은 1953년 6월 10일에 방어진지를 제21사단에 인계하고, 화천 일대의 산양리, 하로곡, 동지화로 이동하여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이는 중공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진 조치였다.
중공군은 휴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7월 13일 야간에 중동부전선의 금성돌출부를 확보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했다. 이에 제2군단 주파령에서 적근산을 잇는 미주리선으로 후퇴했다. 박대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20연대는 7월 14일에 주파리-적근동으로 진출하여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7월 15일에 적근산-삼현지구에 대한 반격작전으로 7월 18일에 602고지를 탈취하고 금성천 만곡부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함으로써 백암산 정면으로 침입한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그는 소대선임하사로서 7월 20일 전투에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대규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74-ㅇ-04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