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대관(朴大觀)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3785
  • 전몰일자 : 19501002

공훈사항

박대관 일병은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박 일병은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1950년 8월 하순경 제주도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사단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다.
박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한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제3사단은 포항을 탈환한 후 흥해 남쪽 고지 일대까지 진출 후 적과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9월 2일 포항과 영일 비행장을 목표로 총공격(9월 공세)을 개시했다.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돌파됨에 따라 사단은 소티재-자명동-96고지 선과 두호동-환호동 선으로 차례로 철수하여 9월 4일까지 적과 뺏고 뺏기는 혈전을 거듭했다. 5일 적은 공격을 감행했고, 사단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방어선이 붕괴되어 형산강 변으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9월 14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연일을 탈환한 후 총반격 태세에 들어갔고, 박 일병과 수색중대원들은 진지 전방에 대한 수색활동을 지속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으로 전환했고, 제3사단은 9월 17일 형산강을 도하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이때 적 제5사단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사단은 해·공군의 폭격 지원하에 치열한 전투 끝에 18일 도하작전에 성공했고, 여세를 몰아 9월 22일 흥해까지 진격했다. 국군은 22일부터 추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사단은 23일부터 추격작전을 전개했다. 사단은 일일 평균 17.3km의 속도로 진격하여 영덕, 울진, 삼척, 강릉(30일)을 차례로 탈환하고, 10월 1일 인구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진함으로써 최초의 38도선 돌파부대가 되었다.
박 일병은 신병임에도 수색대원답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앞장서서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해왔다. 그는 이 추격전에서도 최전방에서 적정을 탐색하며 전진하다가 10월 2일 양양 일대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대관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1면-12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5-ㄴ-03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