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달훈(朴達勳)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1011

공훈사항

박달훈 순경은 1925년 8월 15일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강원도경 영월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영월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박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영월경찰은 지역 내 보급로 경비, 주요시설 경비,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 오열 색출, 치안유지와 함께 북한군의 남진에 대비하여 작전태세를 강화하였다.
7월 1일 강원경찰은 영월과 울진을 제외하고는 군의 작전에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7월 2일 오후 늦게 평창 방면에서 적의 보·전 부대와 동해안에 상륙한 제766유격부대가 영월을 협공했다. 영월경찰은 야음을 이용하여 적의 포위를 벗어나 3일 새벽에 단양으로 후퇴했다. 7월 7일 새벽 3시 영월 북방 4km 지점 동동산 고개에 배치된 영월경찰의 전초가 적의 선두부대를 격퇴했다. 그러나 적 후속병력의 증원과 삼옥 방면으로 우회한 적이 영월로 진격함에 따라 7월 5일 새벽에 영월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북한군의 남진에 따라 영월경찰은 8월 15일 영천까지 후퇴하여 이곳에서 보급로 경비,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퇴각과 함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먼저 동해안의 영일경찰서가 수복되었고 이어서 9월 하순경에 예천, 상주, 문경, 영주경찰서 등이 복구되었다. 영월경찰은 10월 5일 영월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잔적소탕작전과 치안유지활동을 전개했다. 이 당시 북상하던 잔적은 경찰서를 공격하는가 하면 양민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10월 11일 잔적소탕작전에 참가한 박 순경은 영월 방절리에서 적을 격멸하던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달훈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ㅅ-01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