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노창(朴魯昌)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5103437
  • 전몰일자 : 19510214

공훈사항

박노창 이등중사는 1924년 8월 8일에 강원도 춘성군 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9월 27일, 서울 용산의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에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고, 사단 예비로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을 때, 박노창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19연대 본대는 원주에서 기차로 청량리를 거쳐 26일 새벽 5시에 춘천에 도착했다. 이후 연대는 춘천 방면의 제7연대와 홍천 방면의 제2연대를 증원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6월 30일 오후에 원주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7월 한 달 동안 충주-조령-함창 축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하고, 8월 1일에 낙동강을 건너 용기동∼양곡동을 잇는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하여 북한군의 8월과 9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낙동강 전 전선에서 일제히 반격을 개시했다. 제6사단은 9월 23일부터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함창-문경-충주-원주-춘천 방향으로 공격했다. 계속 김화-성천-순천-개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10월 20일에 평안북도 희천에 도착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5일에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 2차 총공세로 압록강을 향해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38도선으로 다시 철수했다. 다시 박노창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의 전곡-추동리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감행하여 서울로 향했다. 이에 제6사단은 1951년 1월 1일 야간에 동두천 부근에서 적들이 후방으로 침투하여 교란하자, 적에게 포위당할 것을 우려하여 방어진지에서 철수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고, 제6사단은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박노창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미 제9군단의 예비사단으로서 주로 군단 후방지역에 대한 수색작전을 했다. 한편 미 제9군단은 1월 15일부터 위력수색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한강 남안까지 진출했다. 이후 제6사단은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 2월 공세 시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에서 돌파구 확장을 방지하기 위해 싸웠다. 그는 2월 1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노창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0414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ㄲ-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