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노중(朴魯仲)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7358
  • 전몰일자 : 19500725

공훈사항

박노중 일병은 서울시 동대문군 신설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7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간단한 소총 조작법만을 익힌 후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노중 일병은 금곡리 일대 전투에 투입되었다. 박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 제3사단이 7월 4일 새벽 공격을 개시하여 금곡리 부근으로 밀어붙이고 풍덕천-수원 도로를 따라 남진하자 일제사격으로 이들을 한때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곧 이은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방어선이 돌파되고 결국 7월 4일 평택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박 일병과 연대병력은 7월 8일 음성을 중심으로 외곽방어선을 형성하고 북한군의 행군대열의 절반이 방어정면으로 들어섰을 때 105mm 곡사포의 지원사격 하에 각종 화기를 일제히 집중함으로써 적의 남진을 분산시켰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연전연패가 계속되자 9일 다시 무극리-음성, 신양리-음성 양측방 도로 접근로와 중앙 산간 접근로의 공격을 개시하였다. 새벽 무렵 북한군은 음성에 포격을 집중하면서 2개 연대병력을 각각 8대의 장갑차의 지원 하에 연대 정면으로 공격하였으나 박 일병과 연대 장병들의 집중적인 저지사격과 역습에 의해 다시 저지되었다.
동관리 일대에서 기습 준비를 갖추고 대기한 지 이틀이 지난 7월 21일 드디어 적의 접근이 탐지되었다. 박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적의 대열이 화망 깊숙이 들어오길 기다린 다음 사격명령에 따라 일제히 집중사격을 사하였다.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은 적의 대열은 순식간에 분산되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고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적은 산과 논으로 심지어 도로변 배수관에까지 숨는 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소탕되어 도로변과 주위 논바닥에는 적의 시체로 가득하였다. 전장 정리를 마무리한 후 24일에는 제17연대와 함께 상주로 이동하였다. 이후 제1사단은 제6사단이 고전하고 있는 함창으로 전진하였다.
박 일병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투에 임하였다. 생사기로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과 맞서 싸웠던 박노중 일병은 1950년 7월 25일 운암리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노중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0판-2면-00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10-ㅋ-06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