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남복(박남복)

  • 군별 : 육군
  • 계급 : 중령
  • 군번 : 10209
  • 전몰일자 : 19500712

공훈사항

박남복 중령은 1916년 11월 5일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광복 후 험난한 격동기에 청년기를 맞이하여 조국을 지키는 간성이 되고자 1946년 9월 23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하여 약 3개월간 교육훈련을 받고 동년 12월 14일 소위로 임관하여 경기도 양주에 주둔 중인 제1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제1여단은 1949년 2월 1일 수도여단으로, 동년 5월 12일 수도사단으로, 동년 6월 10일 제7사단으로 개칭되어 동두천, 포천 축선의 38도선 방어임무에 투입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남한의 불안을 양성하려고 5월 초부터 38도선 충돌사건을 야기하면서 개성 및 옹진사건에 실패하자 6월 12일에 포천 일대 사직리로 약 200명의 병력을 침투시켰으나 제1연대가 이를 공격하여 대부분 격멸함으로써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제7사단은 6·25전쟁 발발 당시 동두천 축선에 제1연대를, 포천 축선에 제9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사단의 예비였던 제3연대가 1950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제2사단 제25연대가 사단에 예속되었으나, 주둔지 수용시설 문제로 아직 충남 온양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사단 정면에 주공인 제1군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사단은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제7사단의 주저항선은 개전 초일에 무너지면서 포천, 동두천이 함락당했고, 둘째 날인 6월 26일에는 제2사단(-)이 축석령에 투입되었으나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철수함으로써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박남복 중령이 진두지휘하던 제1연대는 육본 직할 경비부대 병력과 혼성으로 편성되어 철수와 방어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만 전개하던 중, 일시적인 공격으로 전환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나, 곧 이은 적의 대규모 반격으로 의정부 방면으로 철수했다. 6월 27일 창동방어선과 미아리방어선이 붕괴되면서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던 부대들은 6월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박남복 중령은 부대원을 진두지휘하며 한강 남안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7월 12일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남복 중령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충무무공훈장(훈기번호 3371 국)을 추서하고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122-ㄲ-07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