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남규(朴南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625862
  • 전몰일자 : 19511003

공훈사항

박남규 일병은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로 38도선 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7월 5일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거나 지휘소를 습격하고 탄약고 등 주요시설 폭파 임무를 수행했다.
박남규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휴전회담장이 있는 개성이 포함된 서부전선에서는 충돌을 자제하였으나, 중・동부를 중심으로 한 전선에서는 ‘血戰’을 벌이고 있었다.
8월에 접어들면서 美 제10군단은 南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北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강원도 양구 일대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美 제10군단에 배속된 제5사단은 8월 31일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와 서희령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여 9월 3일 서희령을 탈취했다. 이후 사단은 미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을 인수받아 제27연대를 주력으로 9월 9일 1,211고지를 최초 점령했다. 그러나 사단은 적 반돌격으로 가칠봉으로 철수하여 전투력 복원에 전념했다.
그 후 박남규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10월 1일에 사단 총공격으로 2차 점령 및 철수, 다시 10월 8일에 제27연대가 공격하여 3차 점령하였으나 또다시 적의 역습으로 철수했다. 결국 10월 14일 양구 북방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를 잇는 단장의 능선 전투가 종결될 무렵 사단은 그 동측의 841고지를 점령하면서 이 전투를 종결했다.
비록 사단은 1,211고지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지만 끈질긴 전투로 박달고개-가칠봉-서희령 전선을 굳게 지켜 해안분지(펀치볼)확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아울러 단장의 능선 전투에도 동측방으로 부터의 위협을 차단함으로서 크게 기여했다. 이 전투에서 박남규 일병은 분대원과 함께 양구 북쪽 적진에 침투하여 적 사단 지휘소를 습격 중 10월 3일 적 경계병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남규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5판-4면-19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3-ㅈ-10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