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기태(박기태)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43603
  • 전몰일자 : 19510308

공훈사항

박기태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박 일병은 1951년 1월 20일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제3차 공세를 맞이하여 1·4후퇴를 단행하여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37도선 상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영월 북방 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월 19일 사단의 주공으로 만경대산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20일 영월 탈환의 관건이었던 응봉산을 공격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점령했다. 24일 연대는 영월을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2월 5일 개시된 라운드업작전(위력수색작전) 시 연대는 적의 경미한 저항을 물리치고 2월 10일 평창 북방의 창동리까지 진격했으나, 곧 적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개시했고, 이때, 돌파구의 견부인 횡성 동북방에 배치되었던 연대는 16일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격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해 중동부지역으로 침투한 공산군을 격멸하기 위한 ‘킬러작전(Operation Killer)’(2. 21.~3. 6.)을 전개했다. 이 작전의 결과로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초에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때, 연대는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 공격전투에서 박 일병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진격하다 적탄에 맞아 3월 8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기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32면-1699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8-ㅎ-00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