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기찬(박기찬)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08562
  • 전몰일자 : 19510524

공훈사항

박기찬 일병은 1924년 11월 30일에 경상남도 부산시 온천리(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56의 2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저지하고 있던 1950년 9월 7일 입대하여, 부산에 위치한 육군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박기찬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 진격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제6사단은 38도선을 돌파하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으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두 차례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하여 전곡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한 후 1951년 1월 7일에 평택-안성-장호원을 연하는 선으로 이동하여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전력이 소진돼 더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고, 그 결과 중공군이 수원-이천 선에서 방어하고 있고 추후 공격작전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박기찬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추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문막 북쪽의 판대리 부근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중공군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4차 대규모 공세(2월 공세)를 2월 12일부터 중동부전선에 주력을 배치하여 실시했다.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2월 21일부터 공세로 전환했다. 이에 제6사단은 횡성 방향으로 공격하여 목표를 탈취했다.
사단은 3월 13일에 용문산(1,157고지)과 홍천강을 점령하고, 3월 20일에는 춘천 서남쪽 6km인 의암리와 가평 간을 점령했다.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출했다. 이 전투에서 박기찬 일병은 지암리를 목표로 분대원과 함께 돌격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대구에 위치한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정성스런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51년 5월 24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기찬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해(47묘역-9판-1016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ㅊ-043)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