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승(李基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6800617
  • 전몰일자 : 19510520

공훈사항

이기승 일등중사는 1925년 2월 12일에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으나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9년 7월 1일에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22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연대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육군의 병력 배치 조정에 의해 제6사단 통신대로 전속되었고,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춘천에 위치하며 제7연대를 직접 지원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전 전선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제7연대는 춘천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3일간 저지하고 6월 30일에 사단에 합류하여 원주-충주-문경-함창 축선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연전을 수행했다. 이후 낙동강방어선에서 두 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대규모 공세를 격퇴하고, 9월 16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10월 5일에 춘천 북방에서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23일에는 희천을 점령했다.
이후 제6사단은 압록강을 향해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격을 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으로 철수했다. 이때 사단은 12월 11경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기승 일등중사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부대 이동 간 항상 사단과 연대 간의 통신망을 유지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목표로 총공세(일명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펼친 중공군을 맞아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다음날인 1951년 1월 1일 야간에 후방이 차단되어 방어진지에서 철수했다. 이후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했다가 2월 1일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사단은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했고,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6일에 화악산까지 진출했다. 이후 사단은 4월 21일에 사창리를 점령했으나,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사창리 일대에서 큰 피해를 받고 용문산 일대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중공군은 5월 16일부터 대규모 공세(일명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시작했고, 제6사단은 이를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기승 일등중사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보병부대가 공격할 때에 사단과 연대간 통신지원을 위해 바쁘게 활동했다. 그러던 중 5월 23일에 통신 지원하다가 적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소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승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5판-5면-26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ㅅ-09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