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수(李基壽)

  • 군별 : 공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3201785
  • 전몰일자 : 19500703

공훈사항

이기수 이등중사는 1931년 1월 6일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음에도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럽고 북한군의 도발징후가 농후하던 1950년 2월 12일에 공군 헌병학교로 입대하여 소정의 군사교육을 수료한 후 공군본부에서 근무했다.
공군은 1949년 10월 1일부로 육군으로부터 독립되었고, 이에 육군 항공사령부는 해체되고 공군본부가 탄생하였다. 공군본부는 총참모장 예하에 참모부장, 인사, 정보, 작전, 군수국과 고급부관실, 재무감실, 법무감실, 본부 사령을 두었다. 예하 부대로 1개 비행단, 공군사관학교. 항공기지사령부, 여자항공대, 보급창, 공군병원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17일 국방부 별관에 있던 본부 청사를 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전함으로써 공군 독립의 면모를 가시화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은 여의도 비행단에 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김포지구에 경비사령부를 창설하여 공군 작전의 지속성을 보장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한 공군은 항공기 220대와 2,8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한 반면, 대한민국 공군은 공격이 불가능한 경비행기 22대와 병력 1,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군본부는 예하 비행단을 동원하여 6월 25일∼27일까지 육군의 서울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문산, 의정부, 포천 지역에서 정찰비행 및 북한군에 대한 폭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전쟁 발발 후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6월 27일 본부는 수원으로 이동하였고 결국 6월 28일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공군 비행단은 7월 2일 미 공군으로부터 F-51D 전투기 10대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항공작전을 펼치게 되었고 전황에 따라 수원(6월 27일), 대구(7월 6일)로 이동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기수 이등중사는 헌병하사관으로 부대가 이동할 때에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7월 3일에 비행단은 먼저 떠나고, 비행단을 지원하는 보급 및 정비부대들이 지상으로 철수할 때에 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평택 부근에서 적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아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수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7묘역-6판-4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ㅂ-04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