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수(李基洙)

  • 군별 : 경찰
  • 계급 : 경감
  • 군번 :
  • 전몰일자 : 19530312

공훈사항

이기수 경감은 1922년 3월 25일 전남 순천시 조곡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4년 4월 11일 경찰에 입문했으며, 전몰 당시 전남도경 순천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승주에서 전사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낙동강까지 철수했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까지 북상했던 전선이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인해 다시 남하하자, 1951년 1월 3일 치안국은 대구로 철수하여 32개 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군의 주보급로 경비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또한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월 1일부로 공비섬멸작전 특별기간(제1차 3.10~4.10일, 제2차 4.15~5.25일, 제3차 7.15~8.15일)을 설정하여 태백산과 지리산을 비롯한 전국의 공비소탕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이 경감은 제1·제2·제3차 지리산 지구 공비섬멸작전에 모두 참가했다.
국군은 서남 방면에서 육군 제8사단의 공비토벌작전 완료 이후에도 계속 준동하는 공비를 소탕하고 아군의 보급로 경비와 치안 확보를 위해 9월 16일 경북 경주에서 육군과 경찰 병력으로 구성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사령부는 전북 남원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지리산 일대에서 4기에 걸쳐(제1기: 1951.12.2.~12.14., 제2기: 1951.12.16.~1952.1.4., 제3기: 1952.1.4.~1.31., 제4기: 1952.2.4.~3.14.)공비소탕작전을 전개했는데, 이 경감은 전 기간에 공비소탕작전에 참여했다.
1951년 중반부터 전선이 고착되고 7월 10일 개성 휴전회담이 열리자 1952년 1월 북한노동당은 중앙당과 지구당의 연락을 맡을 역마통신대를 설치하고 지하당 재건을 개시했다. 1952년 7월 제1사단을 배속 받은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지리산을 비롯한 호남지역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등 경찰은 1953년 휴전협정을 조인할 때까지 공비 섬멸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3년 3월 12일 순천경찰은 승주군 원등리에 준동하는 공비들을 토벌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 현장에는 분대규모의 공비들이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는데, 경찰은 즉각 집중사격을 실시하여 공비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이 경감은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를 격멸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수 경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ㅁ-02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