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성(李基晟)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8819165
  • 전몰일자 : 19530426

공훈사항

이기성 하사는 1929년 2월 20일에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3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에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3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기성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을 때, 미 제3사단은 철원 북방의 고대산(464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공산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양측은 1952년 말까지 계속된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실시한 후 전선을 정비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다. 1953년 초 전선의 상황은 양측이 진지를 강화하며 소부대전투만을 반복하는 가운데 휴전회담도 포로송환 문제로 인해 중단된 상황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영향력의 행사, 휴전과 관련하여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 정치 및 심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의 종결 등 군사‧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군은 방어력의 강화와 공세역량에 주력하면서 제한된 규모보다 많은 부대를 정면으로 추진하여 공세를 감행함으로써 긴장을 고조시켰다. 공산군은 미 제9군단 정면에서 압력을 가중함으로써 유엔군 측의 진지를 탈취하려 획책했다.
반면 미 제3사단은 협상을 통한 전쟁의 조기 종결을 도모하는 유엔군의 군사전략에 의해 군사작전의 확대를 스스로 억제함으로써 수세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이 휴전회담을 지연하며 군사력을 계속 강화해 나가자, 유엔군도 군사적으로 단호한 대응을 시도하고자 했다. 이에 미 제3사단은 공세작전을 위한 수색활동을 강화했다. 그러던 중 이기성 하사가 소속된 중대는 4월 26일에 진지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고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성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6판-8면-01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ㄱ-01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