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석(李基錫)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44160
  • 전몰일자 : 19510605

공훈사항

이기석 하사는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초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전황은 서울 함락 후 낙동강까지 철수했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친 상황이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다.
이기석 하사가 소속된 연대는 1951년 1월 송계리-삼척선으로 철수한 후, 2월 3일 공격을 개시하여 2월 7일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전 전선이 밀리게 되자 다시 송계리-삼척선으로 철수하였다. 2월 25일 중공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 하사와 연대병력을 신속히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인하여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됨으로써 공격이 지연되었고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현리-양양을 연하는 카이로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 하사와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4월 22일 서울을 목표로 제5차 공세를 감행하고, 이어 5월 16일에는 인제군 일대에 배치된 국군 제3군단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5월 공세를 감행하였다. 그와 장병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고지를 함락당하였다.
이후 6월 4일 짙게 낀 안개로 관측이 불가한 틈을 이용하여 적은 강력한 박격포 사격의 엄호하에 이 하사와 연대병력의 전초진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장의 1209고지를 공격해왔으나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언제나 선두에 서서 용맹을 발휘하였다. 오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기석 하사는 1951년 6월 5일 향로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석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04-ㅌ-09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