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봉(李基鳳)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109378
  • 전몰일자 : 19521207

공훈사항

이기봉 이등중사는 1931년 3월 16일에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향해 북진작전을 진행하던 1950년 11월 8일,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 후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기봉 이등중사가 부대로 전입했을 때인 1950년 12월 중순, 제6사단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을 후퇴하여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 ‘중공군의 2월 공세’, 용문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4월 및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6월 중순에는 백암산을 좌우로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집중하자, 유엔군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각 부대별로 진지 전방에 대한 공세 활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방어진지 전방의 등대리 부근에 위치한 819고지를 8월과 9월에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탈취했다. 그리고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10월 13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후 10월 21일까지 중공군을 대파하고 교암산-송설리-송동리까지 진출했다.
이후 제6사단은 몇 번의 부대이동을 거쳐 1952년 4월 2일부로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었고, 제2, 제7연대를 전방연대로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연하는 선 상의 진지를 점령하고, 제19연대는 예비로 죽동에 위치했다. 이기봉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교암산 일대를 점령하고 있다가 5월 22일에 제19연대에 방어진지를 인계하고, 사단 예비로 전환하여 부대정비 및 진지보강공사, 수색정찰과 매복활동에 집중했다.
이후 사단은 10월 21일부로 사단 전투지경선이 확장되면서 방어정면이 일부 조정되었다. 제7연대는 교암산을 좌우로 연하는 선으로 원래 방어하던 지역을 담당했다. 이때부터 사단 예하 3개 연대는 전방연대와 예비연대 임무를 교대로 수행했다. 그러던 중 이 이등중사는 12월 7일에 소대원들과 함께 사단 후방지역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와 조우하여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는 분대장으로서 진두지휘하여 적들을 제압했으나, 전투 중에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봉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53묘역-1판-3108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5-ㅎ-06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