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봉(李基鳳)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6952
  • 전몰일자 : 19511209

공훈사항

이기봉 일병은 경상남도 통영군(現 통영시) 욕지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선까지 밀리자 조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50년 9월 초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거나 지휘소를 습격하고 탄약고 등 주요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기봉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당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1950년 10월 8일 대구에서 재창설되어 10월 13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영남 지역 후방지역작전에 투입되면서 적 게릴라들을 소탕했고, 이후 가평, 청평, 춘천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완수했다. 북진을 계속하던 유엔군과 국군이 12월 초 중공군의 두 차례에 걸친 기습공격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어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자, 사단은 38도선 상 전방지역으로 투입되어 철수하는 아군의 엄호작전을 실시한 후 춘천 동북방 탑두울-배후령을 잇는 방어 진지에 투입되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이기봉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와 2월 공세, 4월 및 5월 공세를 맞아 가평, 문막, 단양, 제천, 홍천, 인제 일대에서 격전을 치루면서 철수와 공격을 반복했으며 부대가 포위되어 위기를 맞았으나, 탈출과 재집결을 거치면서 홍천 부근 어론리 일대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 후 사단은 6월 4일 한계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격전 끝에 6월 17일 목표인 서화리 일대의 고지들을 점령했다.
사단은 美 제10군단에 배속되어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와 서희령 점령을 위해 8월 31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10월 14일까지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북한군 3개 사단과 1,211고지를 3번이나 점령했다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 끝에 1,211고지를 적에게 내주었으나, 가칠봉과 서희령을 굳건하게 지켜냈으며, 현 진지를 10월 20일 제3사단에 인계하고 육본 직할로 전환되어 강원도 양양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면서 인근 지역에 대한 수색정찰과 매복작전을 병행했다. 이기봉 일병은 12월 9일 분대원과 함께 설악산 지역에서 수색정찰을 하다가 적과 조우하여 교전 중 적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봉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0판-4면-00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4-ㅅ-03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