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복(李基福)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711456
  • 전몰일자 : 19501104

공훈사항

이기복 일병은 전라북도 김제군 봉남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북한군의 남진에 밀려 소백산맥 선까지 후퇴하자, 1950년 7월 중순 제1교육대에 분연히 입대했다. 제1교육대는 전북지역에서 신병모집을 하던 제3연대를 7월 16일부로 개칭한 부대였다.
한편, 제8연대는 8월 20일 제7사단이 창설되면서 제3·5연대와 함께 재창설되었다. 이 일병은 제8연대 제1대대에 배치되었고, 대대는 8월 29일 제6사단에 배속되어 화산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을 물리침으로써 적의 신녕-대구 진출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9월 2일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되자 연대는 9월 5일 제8사단에 배속되어 영천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북한군 제15사단과 13일까지 뺏고 뺏기는 혈전 끝에 영천을 탈환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16일부로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9월 19일 연대는 수도사단 제18연대와 함께 합동으로 기계 일대 561고지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를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후, 김화-평강-율리를 거쳐 18일 승호리 일대에서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과 모란봉 일대로 진격했다. 연대는 20일 저항하는 북한군 제17, 제32사단의 잔적을 소탕하고 평양을 탈환했다. 이로써 연대 장병들은 제1사단과 더불어 최초로 평양을 점령한 부대원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10월 29일 북진을 계속한 연대는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이 무렵 온정리와 운산에서 아군을 격파한 중공군 제38군이 청천강 이북의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하고, 북상하는 아군 증원부대를 차단하려 했다. 연대는 11월 1일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의 역습에 밀려 후퇴하여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 일대를 점령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7일까지 적과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 끝에 비호산을 지켜냄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끝까지 진지를 지켜내며 용감하게 싸우다 11월 4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복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9판-8면-03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0-ㅁ-02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