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복(이기복)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8201456
  • 전몰일자 : 19501104

공훈사항

이기복 일병은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광복 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7월 하순경 입대하여, 육군직할 제25연대에 배치되어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그리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마저 제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에 투입하였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 지역에 배치하였다. 제25연대는 공비토벌 차 안동에 있던 제1대대를 제외하고 제2·3대대를 동반하고 25일 밤 온양에서 출발하였으며, 6월 26일 아침에 용산역에 도착하여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 지휘 하에 백석천 방어에 투입되었다.
이기복 일병과 부대원들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 방어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렀다. 이기복 일병과 부대원들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선에서 강력한 방어 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으나, 제2차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38선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이기복 일병과 연대병력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용감하게 싸웠던 이기복 일병은 1950년 11월 4일 중공군의 공세로 인한 철수작전에 참가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복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39면-2151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ㅌ-10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