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만(李基万)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47067
  • 전몰일자 : 19510624

공훈사항

이기만 일병은 1932년 7월 7일에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까지 후퇴했던 1950년 12월 중순,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기만 일병이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인 1951년 1월 중순, 제6사단은 장호원 북방의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 직전에 사단은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나,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한 후 1951년 1월 7일에 평택-안성-장호원을 연하는 선으로 이동하여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전력이 소진돼 남쪽으로 더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고, 그 결과 중공군이 수원-이천 선에서 방어하고 있고 추후 공격작전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기만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추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문막 북쪽의 판대리 부근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중공군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4차 대규모 공세(일명 ‘중공군의 2월 공세’)를 2월 12일부터 중동부전선에 주력을 배치하여 실시했다.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21일부터 공세(일명 '킬러작전')로 전환했다. 제6사단은 당시에 횡성 방향으로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기만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3월 13일에 용문산(1157고지)과 홍천강을 점령하고, 20일에는 북한강(당시 춘천 서남쪽 6km인 의암리와 가평 간을 점령했다.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출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부산에 위치한 제7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곳 병원에서 의료진들에 의해 두 달 동안 정성스런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6월 24일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만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86-ㅈ-03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