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덕(이기덕)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376378
  • 전몰일자 : 19520717

공훈사항

이기덕 이등중사는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또 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1월 하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수료한 후 통신학교 조교요원으로 교도대에 배치되었다.
한편 통신학교는 1947년 1월 20일에 경남 진해에서 창설된 남조선 국방경비대 통신학교가 모체가 되었다. 이 통신학교는 1947년 10월 23일 경기도 태릉에 위치한 남조선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로 이동하였고, 통신교육대로 개칭되었다. 이후 영등포에 위치한 통위부에서는 1948년 6월 15일에 직속으로 제51통신대대를 창설했는데, 통신교육대에 예속시켰고, 이는 무선통신교육대로 개칭했다. 그리고 무선통신교육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맞춰 육군 직할 통신학교로 발족했다.
이기덕 이등중사가 통신학교로 배치될 당시 중공군은 서울점령을 포기하고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전환하였으며, 북한군 주력의 일부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 시기에 잠입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과 연결해 산악지대에 은거하면서 후방교란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1951년 7월 10일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진지쟁탈전이 계속되었다. 12월 28일~1952년 1월 8일 간에 문산 정면의 임진강 북쪽 두매리 부근에서 제1사단과 중공군 간에 전초진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이기덕 이등중사는 1월 초에 제1사단으로 전속되어 제12연대 통신담당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12연대는 전초진지 쟁탈전에 투입되어 주저항선을 임진강 북안의 사천-백학산-사미천을 연하는 선으로 추진하여 북한군과 대치하였고 달려드는 북한군에게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혼신의 혈전 끝에 북한군을 격퇴했다.
1952년 7월에 접어들면서 여전히 대규모 작전을 보류하고 계속 정찰과 기습을 통하여 북한군과 접촉을 유지하며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기덕 이등중사는 후방으로 침투한 적 정찰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 중 7월 17일 적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전사자 명부에 전사 장소가 전남 담양은 오기로 추정)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덕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4238 육)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26-ㅂ-11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