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년(李淇年)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위
  • 군번 :
  • 전몰일자 : 19530325

공훈사항

이기년 경위는 1923년 12월 19일 경남 남해군 남해읍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서울시경 성북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서울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도 경찰국에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할 것과 각 지서별로 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대처하도록 지시한 후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한수 이남으로 후퇴한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했다. 6월 30일 1개 대대규모의 적이 오류동을 목표로 공격을 하자 7월 1일까지 피·아간 전투가 벌어져 적을 격퇴했으나 7월 3일 전차 17대를 앞세운 적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영등포를 비롯한 오류동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경찰 각 부대는 수원으로 철수하여 오열 색출, 정보수집, 철도경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7월 23일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지방에서 적 게릴라부대의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자 15,000명의 경찰이 유엔군에 배속되어 적의 게릴라 침투 방지와 소규모 전투를 병행하면서 유엔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전선이 북상됨에 따라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경찰관서의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각 도경은 10월 1일 모두 수복되었고, 시·군의 경찰서도 10월 초순에 모두 수복되었다.
압록강까지 북상했던 전선이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인해 다시 남하하자 1951년 1월 3일 치안국은 대구로 철수하여 32개 전투대대를 편성하여 군의 주보급로 경비 임무를 맡게 했다. 이에 서울경찰은 16개 대대를 편성하여 밀양-경산과 영천-의성 지역을 담당했고, 추가로 2개 대대를 편성해서 1월 30일 경북 청도에서 창설된 운문산 전투경찰사령부에 파견했다. 3월 1일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작전 특별기간(제1차: 1951.3.1.-4.10., 제2차: 1951.4.15.-5.25., 제3차: 1951.7.15.-8.15.)을 설정하고 태백산, 지리산을 비롯한 전국의 공비소탕작전에 돌입했다.
1951년 7월 제1사단을 배속 받은 서남지구경비사령부가 지리산을 비롯한 호남지역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등 경찰은 1953년 휴전협정을 조인할 때까지 잔비 섬멸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내 치안 유지에 매진하던 이 경위는 1953년 3월 25일 서울에서 오열분자를 추격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년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ㄴ-06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