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남(이기남)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718381
  • 전몰일자 : 19511107

공훈사항

이기남 하사는 평안북도 태천군 원면 신흥리에서 출생했다(출생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힘겹게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수색소대는 제2연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었다.
이기남 하사가 부대에 전입해 왔을 때인 8월 중순, 제6사단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10월 5일에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26일에 압록강 초산까지 진출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목표로 한 중공군의 총공세(일명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맞아 철수하여 1951년 1월 6일에는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했다. 이후 사단은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하여 5월 28일에 구만리(화천)발전소-병풍산을 연하는 선을 확보했다.
사단은 6월 5일부터 백암산에서 화천으로 뻗어 내린 643고지-887고지-992고지-취봉 방향으로 공격하여 6월 10일에 적근산-백암산 선까지 확보했다. 이후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은 휴전 협상을 지연시키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자, 유엔군사령부는 휴전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공세적인 행동을 하라고 명했다.
이에 사단은 8월 31일에 백암산 전방에 위치한 등대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9월 1일까지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9월 21일에 공격하여 819고지를 탈취했다. 그리고 10월 13일부터 금성천을 감제하는 교암산(770고지)을 탈취하기 위해 공격했다. 이때 제2연대는 예비로 후속하다가 10월 16일에 전방연대를 초월하여 21일에 교암산을 성공적으로 탈취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기남 하사가 소속된 수색소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수집활동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수색소대는 11월 7일에 적 지휘소 부근에서 적정 수집을 하던 중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남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0묘역-9판-108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6-ㅅ-06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