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택(李今澤)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1958
  • 전몰일자 : 19510201

공훈사항

이금택 일병은 1920년 1월 20일에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現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전 북한의 남침 징후가 높아지고 있던 1950년 5월 하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육군직할부대에 배치되어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부족한 장비와 병력으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직할부대를 전투부대로 동원해 의정부 지역에 중점을 두면서 서울방어를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6월 26일 저녁에는 이금택 일병이 배치된 육본 교도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시켜 창동 지역에 배치했다.
국군은 철수와 방어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를 전개하다가, 일시 공격으로 전환하여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의정부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인해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후 6월 28일부터 한강선 방어 작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는 전쟁초기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국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 3개 혼성사단이 중심이 되어 전차 1개 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1군단 소속 3개 사단과 한강을 잇는 선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그 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지연작전을 실시하여 7월 말부터 낙동강선 방어 작전에 돌입했다.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이금택 일병과 부대원들은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북진작전에 돌입함으로써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했다.
그러나 10월 25일부터 시작된 불법 참전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부근까지 철수했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윤만돌 일병과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평택-원주-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15일부터 반격작전에 돌입해 양수리-횡성-하진부리 선까지 진출했다. 이금택 일병은 아군의 반격작전 시 2월 1일 횡성읍 부근에서 중공군과 교전 중 적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택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5-ㅅ-02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