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조(李今祚)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0339811
  • 전몰일자 : 19500810

공훈사항

이금조 일병은 경상남도 창원군 웅남면에서 출생했다(출생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후퇴함 거듭하던 7월 중순, 대구에 설치된 경북편성관구사령부에 입대하여 교육대에서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이곳에서 편성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했다(육군 제1훈련소의 전신).
한편, 육군본부는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병력 확보와 각 지역 방위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이후 제7교육대는 8월 1일부로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고, 8월 14일 국본 일반명령 제46호로 대구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8월 26일 제1훈련소에 제1·2·3·5·6·7·8·9교육대가 편성되었다. 이들 신병훈련소가 창설되기 전에는 각 도의 편성관구사령부가 임시로 신병 모집과 교육을 했다.
이금조 일병이 입대할 당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소백산맥 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자 낙동강 선에서 최후방어전을 펼치고자 했다. 유엔군은 7월 말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이처럼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정찰대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경북편성관구사령부는 교육 중인 신병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북한군 정찰대에 대응해왔다. 8월 10일 대구 시내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금조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원들은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격멸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소탕작전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6판-1면-10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0-ㄱ-109)에 이름을 새겨, 후세들이 그를 추모·기억하면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도록 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