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우(李今雨)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05531
  • 전몰일자 : 19511117

공훈사항

이금우 일병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노곡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1년 6월경 입대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으로 전입되었다가 육군의 부대조정에 따라 제9사단 28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제9사단은 1951년 6월 24일 새벽 고지 탈환을 위해 3개 방향에서 일제히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고지를 점하고 있는 중공군이 증강된 병력으로 완강하게 저항함에 따라 철수하여, 전력을 정비한 후 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빼앗긴 고지를 되찾기 위해 6월 26일 새벽을 기하여 기습공격을 가해 왔다. 이에 맹렬한 포 지원으로 교차 사격을 하였으나 8부 능선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정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가 소속된 제9사단 제28연대는 7월 말까지 계웅산을 중심으로 한 김화지구전투에서 적의 수차례에 걸친 공격을 저지, 격퇴했다. 아군은 1951년 10월이 되자 적군이 휴전회담을 제의한 이유가 전력 정비를 위한 시간 확보임을 간파했다. 이에 아군은 일명 ‘코만도 작전’이라는 추계공세를 대대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이때 제9사단은 10월 5일 다시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10월 17일 미 제3사단이 맡고 있던 395고지(백마고지) 일대의 방어진지를 인수하여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 시기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그 속에서 전초진지를 탈취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와 수색정찰이 진행되었다. 한편 휴전회담장에서는 유엔군과 적군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정하는 일이 회담의 쟁점이 되었다.
제9사단 제28연대는 11월 3일부터 281고지, 395고지 등에서 전초진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휴전회담장에서는 유엔군과 적군 측이 각자 내놓은 제안에 상대방의 제안을 일정 정도 포함해 가면서 협상을 진행하여, 마침내 1951년 11월 현 전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이 일병은 전초진지 쟁탈전에서 앞장서 돌격을 감행하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951년 11월 17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우 일병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52묘역-1판-2759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68-ㅂ-098)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