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용(李金龍)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220001
  • 전몰일자 : 19530211

공훈사항

이금용 하사는 1930년 2월 1일 강원도 홍천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이 하사는 1951년 11월경 입대 후 제주도 모슬포의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9사단 제30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의 부대 전입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과 그 북방의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 일대에서 적군과 공방전을 펼침과 동시에 제9사단은 4월 5일부로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철원 서북방의 요충지인 395고지(백마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6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유엔군과 적군은 1951년 11월 27일 현 전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큰 전투 없이 소규모 전초진지 전투와 전투정찰 위주의 탐색전을 1952년 전반기까지 지속했다. 이 기간동안 제9사단은 1952년 4월 19일 사단 정면에 위치하여 아군의 관측과 기동에 제한을 주고 있는 300고지를 기습하여 적의 방어시설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제9사단은 1952년 6월 21일 대규모의 포로획득과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공군 1개 연대병력 3,5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사단 정면의 50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9월에 접어들어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격화되었다. 사단은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제112사단과 12차례의 백병전이 거듭되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사단은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철의 삼각지 서남부에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전투를 마친 제9사단은 10월 26일 진지를 미 제3사단에 인계하고 사창리에서 부대정비를 한 후, 11월 25일 제2사단 진지를 인수하여 김화지구의 저격능선 일대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 하사는 1953년 2월 11일 매복작전 중에 적의 습격을 받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용 하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23묘역-3판-747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0-ㅁ-01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