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용(李今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48072
  • 전몰일자 : 19510426

공훈사항

이금용 일병은 1921년 2월 1일 서울시 마포구 창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자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50년 12월 30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37도선 상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영월 북방 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북한군 제5군단이 원주 지역에 깊숙한 돌파구를 형성하고, 제2군단이 경북 안동까지 종심 깊게 침투함에 따라 연대는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서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월 19일 사단의 주공으로 만경대산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20일 영월 탈환의 관건이었던 응봉산을 공격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점령했다. 24일 연대는 영월을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16일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평창군 백석산과 백적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2일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연대는 공격을 전개하여 4월 중순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진지를 지켜내며 용감하게 싸우다 4월 26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유해(40묘역-2판-1668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2-ㄹ-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