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옥(李今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2604664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금옥 일등중사는 1929년 1월 14일 충청북도 충주군 치현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7월 22일 제5사단 제3연대에 입대했다. 이 일등중사는 ‘여·순 10·19사건’의 반란병력을 진압하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에 소속되어 1950년 1월 25일까지 잔당토벌에 앞장섰다. 1월 25일부로 제3연대는 제7사단으로 예속 전환되었다가 동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3연대는 송우리 전투, 창동 전투, 한강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지연했다. 7월 5일 육군본부는 부대를 재편하여 손실이 심한 제5, 제7사단을 해체했고, 이때 연대도 해체되었다. 이후 제3연대는 민부대(제7사단 후신으로 임시 편성된 부대로 민기식 대령이 지휘)의 일부로서 임실-남원-운봉-함양-하동-진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펼쳤고, 8월 1일부터는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마산 방면에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육군본부는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와 제5포병대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제7사단을 창설했다. 사단은 신령지구 전투와 영천 전투에 투입되어 적의 공세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고,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11월 3일 연대는 비호산에서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7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15일까지 승호리-신계-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이후 연대는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준비에 매진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등중사는 소대원을 독려하며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1951년 1월 1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옥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위패(32판-2면-22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ㄴ-02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